0803 셋째날입니다!!!!
유령마을
유령마을... 정말 유령같이 못찾겠음... 잘못했으면 시리아 국경까지 갈뻔~ UN 군이 도와줌..
헬몰산
헬몬산(Mt. Hermon)
헬몬산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2814m이다. 헬몬산의 융기로 인해 주변에 계속이나 분지등의 낮은 지역을 동반하게 되었다. 북쪽의 안티레바논 산지의 한 지맥과 이어지며 30km의 길이로 년준 1500mm의 강우량을 가진다. 대부분의 눈으로 된 강우량은 여름까지 서서히 녹아 남으로 요단, 북의 리타니, 동의 다메섹으로 흐른다.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를 이루었으며(신 3:8;4:48, 수 11:17, 삿 3:3) 주변의 우거진 숲과 산기슭의 강 근원들, 그리고 눈으로 덮여있는 정상의 모습들로 고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적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Nimrod Fortress
고대 희랍신화에 나오는 삼림의 신 '판'을 섬기는 신전이 있는 곳이기도 한 이곳은 국립공원이 있다. 헤롯은 흰대리석의 신전을 지어 아우구스 황제에게 바쳤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기를 오셔서 제자들을 향해 자신에 대해 물으셨을 때 베드로의 유명한 신앙고백인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했던 곳이다(마 16:13-20).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반석으로 삼으시고 교회를 세우실 것을 말씀하신 곳으로 베드로의 신앙고백위에 교회의 기초가 잡힌 곳이 바로 이곳이다. 현재는 기독교 유적은 존재하지 않고 판신의 신전유적만 남아있다.
Tel Dan
단 (Dan, 텔단)
헬몬산 아래 큰샘들이 터져 단강이 시작되는 광활하고 비옥한 평지 가운데 위치한다. 요단강 근원 중 하나이다. 단은 히브리어로 '심판'이라는 뜻이다(창 49:16). 현재 레바논 국경에 가까우며 구약시대에도 북쪽의 끝지역을 나타내었다(삿 21:1, 삼상 3:20, 삼하 3:10;17:11;24:2,15) 텔단은 북 요단강의 수원인 세네, 바니야스와 함께 중요한 수원중 하나로 요단강의 이름도 단에서부터 흐른다는 의미이다. 주전2500년경 큰도시가 있었고 성경엔 창 14:14에 처음 언급되며 단의 원래이름은 레센(수 19:47), 또는 라이스(삿 18:29)였다. 이스라엘의 단지파가 라이스를 점령하고 단이라 불렀다(삿 18:27-29). 북왕국의 첫왕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둔곳(왕상 12:25-32)이며 성벽과 성문도 쌓은곳이다. 이때 건축한 야외의 큰 제단의 일부가 현재 남아있다. 이 제단은 후에 아합왕과 여로보암 2세때 보수되었고 로마시대까지 제사지내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적이 단에서 쳐 올 것을 예언했고(렘 8:16) 야곱의 말 중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창 49:126)말중 '심판의 언덕'이라는 뜻의 아랍어 텔엘콰디라 부르기도 한다.
삿18:1-30 단지파의 이동, 왕상12:25-33 여로보암의 금송아지, 삿20:1, 삼하24:2, 왕상5:5 이스라엘 북방 경계, 왕상 15:16-22 아람왕 벤하닷의 침입
Hazol
갈릴리 바다에서 정북으로 약 20km 지점에 있는 평지보다 약 40m 높은 언덕이고 넓이가 길이 1km, 폭 700m 정도의 넓은 언덕으로 남쪽을 윗성, 북쪽을 아랫성이라 한다. 주전 3000년경부터 도시가 21회에 걸쳐 섰으며 가나안 시대에는 가장 중심이 되는 도시였다. 주전 13세기 중엽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을 정복할 때 이곳을 점령하고 불살랐다(수 11:13).
이스라엘은 윗성을 사용했고 성경상으로도 윗쪽이 주로 언급되었다(삿 4). 솔로몬의 윗성성문은 아직 남아있으며 구조가 므깃도나 게셀의 것과 같다. 오므리 왕 시대의 저장실과 물길등을 만들어 더욱 견고한 성을 지었으나 100년 후 여로보암 2세때의 지진(암 1:1)으로 파괴되었고 앗수르에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완전히 파괴되었다(왕하 18:10-12). 하솔키부츠에 하솔박물관이 전시되어 있다. 갈릴리 지역 가장 강한 성읍. 수 11:1-15 여호수아의 정복, 삿 4:1-5:31 하솔왕 야빈(군대장관 시스라)과 여선지 드보라간의 전쟁, 왕상 9:15-22 솔로몬의 요새화, 왕하 15:27-29 앗수르왕에 의해 함락.
0804 넷째날입니다!!!!
Akko
악고(Akko)
지중해 북쪽 해변도시로 십자군 시대의 성벽과 건축물 일부가 남아있고 그 중 지하건물이 잘 보존되어 있다. 아셀 지파가 악고의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하고 산 기사가 있다(삿 1:31). 주전 4세기 알렉산더에 점령당했고, 두로, 시돈과 함께 중요 군사·상업적 항구도시로 발전했다.
애굽의 톨레미 왕조에 점령되어 바울이 두로를 떠나 돌레마이에서 하루를 지내다 가이사랴의 빌립의 집으로 떠난(행 21:7) 성경기사에서 보듯 주후 1세기까지 돌레마로 불리웠다. 외국인들의 전도지로 주후 190년경 최초의 주교인 크라루스가 여기서 나왔다. 주후 7세기경 아랍시대엔 팔레스타인 지역의 가장 중요한 항구로 사용되었고 1104년 십자군의 통치를 받다가 1187년 회교인 살라딘왕에 의해 전국이 점령당했다가 악고지역만 1191년 십자군에 의해 다시 회복되었다. 그후 몽고, 애굽, 사이프러스등의 침입을 받았고 결국 1291년에 완전멸망 당했다.
아셀지파에게 분배되나 가나안 사람들을 쫒아내지 못한다(삿 1:31). 돌레마이로 불리지던 기원전,후에 사도 바울이 머물렀다(행 21:7). 이곳에는 십자군시대의 성 유적과 교회의 유적이 지하도시에 있다. 나폴레옹이 1799년 성지탈환을 위해 왔다가 60일간 통치하고 전쟁에 져서 돌아간다.
Rosh Hanika
Zioppori
Nazareth
나사렛(Nazareth)
예수 탄생의 예고, 나사렛에 돌아온 아기 예수 눅2:39, 예수의 소년시절 눅2:51, 예수를 나사렛 사람이라 부름 마2:22-23, 나사렛 회당 눅4:15-30, 유다인의 왕 나사렛 예수 요19:19
1. 수태교지교회
1955년에 짓기 시작해 1969년 완성된 이 교회는 그 자리에 세워진 다섯 번째 교회이다. 마리아 집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으로 처음 교회가 세워졌으나 성지의 주인이 바뀜에 따라 파괴되고 복구되는 역사가 다섯 번이나 반복된 것이다. 성지의 교회중 가장 크며 아름다운 교회로 베이지색 건물에 옅은 벽돌색 돌을 줄무늬가 되도록 배열했다.
교회 전면에 가브리엘 천사가 수태소식을 전해주는 장면과 예수의 전기가 조각되어 있다. 예수탄생과 관련된 성경말씀도 라틴어로 음각되엉 lT다. 이 교회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뽀족탑 형태의 지붕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져서 정점에서 만나도록 설계된 모양으로 교회안에서 올려다보면 백합꽃을 거꾸로 세워 놓은것같아 하늘에서 백합꽃이 내려오는 느낌을 받는다.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를 상징하는 것이다.
교회밖의 벽면을 가득 채우는 성화들이 있는데 여러나라의 토착화된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의 모습을 그렸다. 각 나라에서 직접 보내온 모습들이 전시되어 나라와 민족을 초월한 구주라는 진리의 감명을 준다. 나사렛의 아랍인들은 대부분이 크리스천이다.
2. 요셉교회
1914년 요셉의 집터위에 세운 교회로 수태교지 교회에서 약 100m 떨어져 있다. 주님당시 나사렛은 겨우 100-150명 정도의 작은 동네로 작은 동네여서 마리아와 요셉의 집은 가까웠던 것이다. 지하에 요셉의 일터도 있으나 확실한 근거가 부족하다. 여기엔 사방 2m크기의 세례받는 곳도 있다.
우리가 목수로 번역하는 테크론이라는 헬라어 단어가 단지 목수만 아니라 집짓는 모든일들을 지칭하는 의미이다. 카톨릭에선 요셉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라 말한다.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이 지켜보는데 임종했기 때문이다.
Bet She'arim
베트 쉐아림 (Bet Shearim)
2성전시대 말기 언급되기 시작하여 헤롯 아그립파 1세의 딸이자 아그립파 2세의 여동생인 베레니체 공주의 영토였고 도시를 성벽으로 둘러싸은 훌륭한 성채도시 였다고 한다. 바르 코흐바가 이끄는 유대인 봉기 이후 135년경 유다 자손인 나시가 중요한 유대 철학 및 종교적 중심지로 전환시켰다.
베트 쉐아림이란 '100개의 문을 가진 집'이란 뜻으로 나시는 이곳에다 산헤드린을 설치했고 미쉬나의 최종편을 완결했다. 이렇게 유대인의 성지가 된 베트 쉐아림은 3세기 무렵에는 성지에 묻히려는 유대인이 몰려들어 때 아닌 무덤 지역으로 변했고 특히 팔미라, 베이루트, 시돈같은 추앙받는 랍비들이 다투어 자신들의 영생의 집을 베트 쉐아림으로 정하는 바람에 열기가 가열되었다.
351년에 유대인 봉기가 다시 발생하자 로마의 갈루스 케사르는 팔레스타인 땅의 모든 유대인 마을을 파괴하고 싹쓸이 작전을 전개한다. 이때 베트 쉐아림도 철저하게 파괴되지만 간신히 작은 유대인 마을로 맥을 이어오다가 이슬람 제국의 침입때 완전히 멸망했다. 로마와 이슬람의 침범때 성스런 무덤들이 대파되었지만 다행히도 지하 석굴묘여서 페허 이후에 흙과 돌이 뒤덮여 더 이상 파괴를 면한 상태여서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전해올 수 있었다. 1936-1940년까지 실시된 발굴작업을 통해 옛 산헤드린 땅 베트 쉐아림의 유적이 다시 드러나게 되었다.
- 카타쿰베 (Catcombs) : 텔 베트 쉐아림 북서쪽에 위치한 카타쿰베는 유대인 성지에 묻히고자 했던 열기를 대변해 주는 지하무덤군이다 5에이커의 지하에는 연대를 달리하는 많은 무덤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로마스타일의 지하 카타쿰베 스타일이며 화려하다.
- 시나고구 : 지하무덤 윗쪽 도로에 위치한 15 X 35m 크기의 직사각형 시나고구 터는 3세기경의 것이며 역시 지성소 부분이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터를 향한다. 1938-1939년의 발굴작업에서 드러난 시나고구는 로마의 갈루스 케사르가 공격해 왔을 때 파괴된 것으로 보여진다. 유적에는 단 1자의 히브리어 문양과 15자의 그리스어 문양이 새겨져 있다.
갈멜산
무흐라카
무흐라카는 갈멜산 줄기 중 한 봉우리로 엘리야가 단신으로 바알 종교와 대결하여 승리한 곳이다. 하이파에서 45분 거리로 '불의 장소', '불이 내려온 곳'이라는 뜻으로 산 위에는 엘리야의 석상이 세워져있다. 석상 받침대에는 라틴어, 아랍어, 히브리어 3개 언어로 . "그 때 예언자 엘리야가 불같이 일어났으니, 그의 말씀은 횃불같이 타올랐다"라는 외경의 엘리야에 관계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엘리야는 여기서 승리한 후 산 밑의 기손강에서 450명의 바알신 추종자들을 처형한다.
아셀지파에 속함 수19:26, 갈멜산과 엘리야 왕상18장, 기름진 밭 사10:18, 16:10, 아름다운 처소 아7:5,힘을 상징함 렘46:18.
Hiafa
하이파(Haifa)
북부 이스라엘의 중심지며 항구의 현대도시이다. AD 3세기경부터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두르즈, 회교, 기독교, 바하이교 등의 신자들이 많이 있다. 이곳으로 엘리야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죽인 기손강이 흐른다. 갈멜산 언덕쪽에 있는 바하이사원이다. 그리고 서쪽 바다가 보이는 언덕 아래에 스텔라 마리아 수도원과 그 옆에 엘리야 동굴이 있다.
0805 다섯째날입니다!!!!
엘리야동굴
가이사랴
카이세리아 (Caesaria, 가이사랴)
가이사랴가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기원전 331년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정복했을 때이다. 당시 이곳에는 페니키아인이 세운 작은 항만이 있었다. 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북상하고 기원전 63년 가이사랴는 로마땅이 된다. 폼페이는 하스모니안 왕국의 왕을 젖혀놓고 헤롯에게 통치권을 부여한다. 당시 폼페이와 시저는 앙숙간이었고 시저는 장인인 폼페이를 살해하고 권력을 잡는다. 안토니우스는 시저의 양자로서 권력을 계승했지만 시저의 유언상의 양자는 마케도니아에 있는 옥타비아누스였다. 두 사람의 적법한 양자 판결과 권력 다툼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리가 자결한 후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최초의 황제로 등극하고 아우구수투스라 개명한다. 시저의 적법한 후계자가 되기위해 카이세르 아우구스투스(가이사 아구스도, 시저 아구스도)로 개명하고 정식으로 헤롯을 유대왕으로 봉하고 팔레스타인 땅 전부를 다스리게 한다. 이에 헤롯은 기원전 22년에서 12년에 걸쳐 스트라토나스 피르고스에 멋진 항구도시를 만들고 '카이세리아(가이사랴, 항구의 도시)로 명하고 황제의 은총에 보답한다.
로마 통치시절 황제를 찬양하는 두 도시가 바로 가이사랴와 신전을 지어 바쳤던 가이사랴 빌립보 이 두군데이다. 헤롯은 당시 항만이라는 개념을 초월하여 현대 항구의 기원인 인공항만을 세계최초로 이곳에 건설했다. 야외극장, 대전차 경주장, 정의의 정원등을 건설하고 담수를 멀리서부터 수로를 연결하여 끌어왔다. 성벽을 반원으로 둘러쌓아 적으로부터의 안전도 도모한다. 가이사랴에서 발생한 신약성서 사건은 빌립과 사울과 베드로의 이야기인 행 8:40, 9:28-30, 10장등이 있다.
1) 로마 원형극장 : 1970년에 복구작업이 끝나 저녁이면 각종 야외 콘서트등이 개최된다. 행사일정은 텔아비브 투데이(관광객용 팜플렛)를 참조하거나 텔아비브 투어리스트 인포메이션에 문의한다. 매표소를 지나 왼편의 정원은 석상과 각종 유물을 전시하는데 이 중에서 본디오 빌라도가 이곳 총독이었다는 내용이 새겨진 돌판이 서있다. 돌 받침대 위의 오른편 귀퉁이가 파인 네모난 돌에 라틴 문자가 새겨진 돌이다. 돌에는 '(PON)TIUSPILATU(S)'라고 적혀있는데, 괄호안의 글자는 잘려나갔다. 발굴된 잔해를 모두 결합시키면 '본디오 빌라도 유다총독이 티베리아 황제께 경의를 표하며 이 성전을 건설하여 바치다'이다.
2) 십자군 도시 : 여기엔 항구를 마주보며 십자군 시대에 지은 사도 바울 성당이 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의 길을 떠나기 위해 최초로 배를 탔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바울을 기념하여 비잔틴 제국 시절에 최초로 교회를 건설했고, 이슬람 제국 시절 교회를 파괴하고 그 터 위에 모스크를 건설했다. 십자군 시절에 다시 모스크를 파괴하고 성당을 지었다. 헤롯은 바다를 끼고 길게 뻗은 지형을 이용하여 방파제용의 바위를 쌓고 현대의 항만처럼 정식항구를 건설하여 팔레스타인의 국제항구로 이용했다.
3) 수로 : 헤롯이 카르멜산(갈멜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나할 타니님과 현재 마간 미카엘 키부츠에 속한 카바라 샘의 두 군데 주요 수원지와 연결하여 16km에 달하는 석조 수로를 통해 도시로 물을 끌어들인 곳이다.
소라 (Zora)
소렉 골짜기 북쪽 언저리 위치하며 벧세메스에서 북쪽으로 3.5km 떨어져 있다. 삼손이 태어난 소라는 에스다올(삿 13:25)과 벧세메스 중간의 길 서쪽의 산 정상이다. 소렉골짜기를 타고 내려가면 삼손이 장가든 딤나(삿 14:1)와 드릴라가 이 골짜기에서 살았다(삿 16:4).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실로에서 법궤를 가져와 에벤에셀의 전투에서 블레셋에게 빼앗긴다(삼상 4:1-11). 이 법궤가 아스돗으로 옮겨지자 하나님은 큰 재앙을 내린다(삼상 5:1-7). 그러자 아스돗에서 가드로 옮기자 그곳에도 재앙이 내리자(삼상 5:7-9), 다시 에그론으로 옮기자 그곳 사람들이 부르짖어 반대하나 있는 동안 재앙을 받고(삼상 5:10-12), 결국 '해의 집'이라는 뜻의 벧세메스로 옮겨온다(삼상 6:1-21). 블레셋에 법궤가 6개월간 머물다가 이스라엘 지경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으로 옮겨와(삼상 7:1-2) 20년 이상을 있게 된다. 사울왕은 법궤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BC 2,000년전부터 사람이 살며 해신을 섬겼고 지금의 유적은 비잔틴시대의 것이 대부분이다.
라커쉬
라키쉬 (Lachisch)
사진 없음 -_-a
유다의 가장 큰 병거성이자 남쪽 쉐펠라 입구에 위치하여 유다 산지를 들어가기 위해서 꼭 거쳐야 하는 성읍이다. 기원전 1220년 여호와의 후원으로 태양도 달도 멈추게 했던 기브온 전투 끝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은 라기스 왕 야무스를 교수형에 처하고 라기스 주민을 말살한 뒤 이스라엘 땅으로 삼았다(수 10:5-33). 조직적인 전략과 막강한 병력을 자랑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이틀간의 전투로 간신히 함락할 정도로 막강한 도시였을 것으로 성서 고고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으나 발굴작업 결과 당시 라기스에는 방어 성벽이 없었다고 한다. 유다지파의 기업이었지만(수 15:39) 이후 200년동안 폐허 상태였다. 수 10:1-5 아모리 다섯왕중 하나, 대하 11:5-12 르호보암의 요새성, 대하 25:25-28 아마샤왕은 반역을 피해 이곳에 도망했으나 죽음, 왕하 18:13-17 앗수르의 침입, 렘 34:7 산헤립 침공시 남은 두성읍(아세가, 라기스)
베트 구브린 (Bet Guvrin)
- 마레사 도시 유적 : 구약성서의 마레사 유적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이 제비를 뽑아 땅을 정할 때 유다지파의 땅이 되었으며(수 15:44) 남북 왕국 분리 후 남왕국의 르호보암에 의해 라기스와 함께 성채 도시가 건설되었다(대하 11:11). 유다왕국의 아사왕 시절 구스(에티오피아)사람 세라가 쳐들어와 마레사에 진을 쳤을 때, 여호와의 힘으로 그들을 물리쳤다(대하 14:9-11). 여호사밧은 악을 행하던 이스라엘왕 아하시야와 같이 배를 만들어 다시스로 가려할 때 마레사의 예언자 엘리에셀은 '왕이 아하시야와 교제하는 고로 여호와께서 왕의 지은 것을 파하시리라'라고 예언하고 배는 난파된다(대하 20:35-37). 마레사는 기원전 701년 앗수르의 산헤립에게 함락되고, 기원전 587년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에게 항복한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유대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이후 마레사는 더욱 활기찬 도시로 변하는데 이집트로 보낼 유대인 노예를 매매하는 시장이 섰기 때문이다. 마레사는 점차 번성하여 200년 로마 통치시절 세프티무스 세베루스에 의해 자유 무역 도시로 지정되었다. 현재의 이름 텔 산다한나는 12세기 십자군이 성체에 성 안나 교회를 건설한 이후부터 이슬람인에 의해 이렇게 불렸다. 주차장 매표소에서 지도를 받으면 초록색 길은 유적이고 노란색길은 수백개의 동굴 중 공개되는 동굴이다.
1) 비둘기 동굴 : 동굴의 안벽엔 수많은 작은 홈이 파져있는데 이것은 마레사는 60여개의 동굴에다 수만마리의 비둘기를 집단 사육하던 도시로 흔적이 남은 것이다. 기원전 3세기 경에 판 동굴이다.
2) 목욕탕 동굴 : 10여개의 동굴이 있는데 거대한 바위산을 파서 대중탕을 만들고 저수지와 수로를 연결하여 물을 공급했다. 현재 온수와 냉수를 공급하던 수로와 욕탕으로 들어가는 계단, 두 개의 작은 휴게실이 남아있다.
3) 가옥 동굴 : 알렉산더 대왕 시절부터 만들어졌으며 기원전 113년 하스모니안 왕국당시 제조된 동전들이 발견되었다.
4) 저수지 동굴 : 알렉산더 시절에 판 합리적인 구조로 물을 조달하기 위해 지하로 깊게 파서 저장했고 물이 줄어들때도 갈 수 있도록 긴 계단이 지하까지 연결되어있다.
5) 기름집 동굴 : 역시 알렉산더 시절에 판 넓고 밝은 장소로 멧돌 모양의 바위가 올리브 씨앗을 빻아 기름을 짜던 기름틀이다. 올리브 오일은 주요 소득원이었고, 15에이커에 달하는 주변 계곡에 올리브 나무를 심어 연간 9톤의 올리브 기름을 짜서 공급했다.
6) 종 동굴 : 영화 람보 3를 촬영한 곳으로 거대한 종의 모양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드뎌 도착!
저 차를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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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일시: [2004]0801-0805
여행 국가: Israel
여행 도시: 성지 곳곳
홈페이지 : http://hope.ne.kr/www/bbs/view.php?id=trip_board&no=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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