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하나님 나라를 유지하며 확장해 나가는 길 / 말씀: 여호수아 20~24장
설교자: 박득훈 목사님
하나님나라를 유지하며 확장해 나가는 길
여호수아 20-24장
박득훈 목사
(1980-1983 책임간사, 현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 언덕교회 목사)
때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혹은 대사회적으로 왜 이렇게 어려울까, 하는 탄식을 하게 됩니다. 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높은 빌딩을 올라가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편하고 즐겁게 할 수는 없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본질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감사하게도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권면한 것처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빌 2:12). 구원을 경험하는 것과 하나님나라를 누리는 것은 같은 실체를 설명하는 다른 표현입니다(마 19:23-26).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에 긴장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근원적 이유가 있습니다. 한편으론 이미 누리고 있는 구원 즉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한없이 즐겁고 감사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한편으론 성취해가야 할 구원 즉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라는 과제를 안고 바짝 긴장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그래서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합니다(롬 8:24). 이미 구원을 일정하게 경험하고 있는 로마 성도들에게 구원의 완성은 여전히 소망의 대상으로 미래에 놓여져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나라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인에게 이미 임한 영적 현실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나라와 그 의가 온전히 실현되도록 싸워야 할 그 나라의 전사들입니다.
이런 하나님나라의 현실에 대하여 우리는 아쉬워하거나 불만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간 과정은 마치 한 생명이 신비롭게 태어나 단련과 성장의 과정을 거쳐 성인이 되는 것과 매우 흡사합니다.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지만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과정을 긍정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을 어떻게 보내야 구원 즉 하나님나라의 완성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배우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여호수아 20-24장은 매우 의미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의 영도아래 부분적이긴 하지만 가나안 정복에 일단 성공하였습니다. 아직 정복되지 않은 땅까지 믿음으로 각 지파에게 분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분배된 땅이라고 할지라도 자동적으로 그 점유권이 영구히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 20-24장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이미 분배받은 땅을 지속적으로 소유하며 미처 정복하지 못한 땅까지 정복할 수 있는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본문은 하나님나라를 이미 받았지만 그 유지와 확장을 위해 지속적으로 힘써야하는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물론 땅의 정복과 분배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정치경제공동체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여호수아서를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공동체 현장에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하지만 구약과 신약 사이의 지속성과 단절성을 잘 이해하면서 여호수아를 묵상한다면 풍성한 교훈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나라를 유지하고 확장해나갈 수 있는 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도피성을 통한 사법정의 실현(20장)
가나안정복 전쟁이 일단락되고 땅의 도상(圖上)분배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제 20장부터는 그렇게 분배된 땅을 어떻게 온전하게 정복하고 영구히 유지해나갈 수 있는지 그 길을 제시합니다. 첫 번째 길은 오살자(誤殺者)를 위한 6군데의 도피성 마련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직접 명령하신 바이며 이는 이미 모세에게 명한 바이기도 합니다(민 35:9-34). 이는 오살 즉 미움이나 고의성이 없는 살인행위, 말하자면 과실치사(過失致死)를 저지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사법적 고려입니다. 민수기에 보면 오살자의 예를 들어줍니다. 아무런 원한 없이 우연히 사람을 밀치거나, 돌이나 어떤 것을 던졌는데 그만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죽은 경우입니다(민 35:22-23). 도피성은 이런 오살자가 도피하여 죽은 사람의 피붙이로부터 직접 복수를 당하지 않도록 하는 장소입니다.
도피성 장로는 도피자의 진술을 듣고 적격판정을 내립니다. 적격판정을 받은 도피자를 피붙이 복수자들로부터 보호합니다. 도피자는 회중 앞에서 정식재판을 통해 오살판명을 받아 고의적 살인의 누명을 벗거나 혹은 당시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 후엔 자기 성읍의 자기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도피성을 가나안에 세 곳 그리고 요단강 동편 지역에 세 곳을 마련하게 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도피성 제도는 사회구성원간의 직접적인 처벌행위를 원천적으로 금하는 근대민주사회의 사법체계에 비하면 여전히 원시적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고대사회에는 피붙이 보복제도가 일반적으로 허용되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도피성제도의 도입은 하나님나라 백성의 높은 사법정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엔 실수한 자를 과잉복수로부터 보호하려는 인권의식이 함의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언제나 사람들의 공동체를 통해 펼쳐집니다. 이는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의 유지와 확장을 위해선 사람들 간의 정의로운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하나님나라를 하나님과 인간의 수직적 관계로만 이해하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영역과 범위를 부당하게 축소하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편협 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들은 내면적 영성확립에는 총력을 기울이지만 사람들 사이의 정의확립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일은 세상법정이나 관심을 가질 일이지 하나님나라 백성과는 아예 무관하거나 관련성이 있다하더라도 주변부에 해당하는 사소한 일로 치부합니다. 인권보호나 사법정의 실현을 위해 앞장서는 그리스도인을 찾기 어려운 것은 이런 풍토에서 당연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편협 된 사고를 훨훨 벗어 버리고 하나님나라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데 힘을 써야겠습니다. 오늘날도 인간의 가장 본능중 하나인 복수심 때문에 개인, 공동체 그리고 국가 간의 관계가 무섭게 파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마저 복수심에 불타올라 사법정의를 무너뜨리는 경우가 왕왕 발생합니다. 교회분규 현장을 보십시오. 기독인 지도자들이 전쟁을 일삼는 현장을 보십시오. 참으로 슬프고 불행한 일입니다. 하나님나라 백성은 이런 잘못들을 함께 회개하고 인간의 타오르는 복수심을 정의의 힘으로 적절히 통제하는 일 즉 사법정의의 확립에 힘을 써야 합니다. 그런 노력을 통해 하나님나라는 유지되고 확장될 것입니다.
2. 레위지파의 삶의 터전 마련을 통한 예배공동체 확립(21장)
21장은 레위지파가 경제적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마흔여덟 개의 성읍과 그 주변에 딸린 목초지 즉 삶의 터전이 분배되는 내용을 아주 자세하게 담고 있습니다. 레위 지파를 아론의 자손들, 그핫 자손들, 게르손 자소들, 므라리 자손들의 네 그룹으로 나눠 각각 제비를 뽑아 열두 지파에 속한 땅에서 성읍과 주변의 목초지를 분배받게 합니다. 아론 자손들은 유다, 시므온, 베냐민 지파의 땅에서 헤브론의 도피성을 비롯해 13개의 성읍과 목초지를 배당받습니다. 그핫 자손들은 에브라임, 단, 므낫세 반 지파의 땅에서 세겜의 도피성을 비롯해 10개의 성읍과 목초지를 배당받습니다. 게르손 자손들은 므낫세 반 지파, 잇사갈, 아셀 지파의 땅에서 갈릴리 게데스와 바산 골란의 도피성 두 개를 비롯해 13개의 성읍과 목초지를 얻습니다. 마지막으로 므라리 자손들은 스블론, 르우벤, 갓 지파의 땅에서 길르앗 라못의 도피성을 비롯해 12개의 성읍과 목초지를 분배받습니다.
대부분의 현대 독자들에겐 너무 지루하게 느껴져 그냥 넘어가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이 문제가 이스라엘 백성 즉 하나님나라 백성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반영해줍니다. 이는 단순히 특정 지파의 경제적 문제가 아닙니다. 레위지파는 이스라엘을 예배공동체로 유지해나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한 제사를 둘러싼 모든 일을 도맡아 전적으로 운영하고 주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경제적 삶의 터전을 제공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예배공동체로 만들어가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땅을 소유한 후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소홀히 하거나 상실해버린다면 그들은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을 점유할 신앙적 당위성을 상실하게 되고 결국 그 때문에 그 땅에서 다시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저자는 그런 강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엄숙하게 레위지파를 위한 성읍과 목초지 분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그 성읍과 목초지 분배가 레위지파의 족장들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 족장들에게 먼저 요청함으로 이뤄졌다는 데 있습니다. 이는 모세가 이미 명한 바였는데(민 35:1-8) 이를 먼저 상기시킨 사람들은 레위지파 족장들 자신이었습니다. 그들보다 다른 지파 족장들이 먼저 기억하고 나섰다면 그림이 더 좋았을 것입니다.
사실 여기에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담겨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들의 공동체를 예배공동체로 유지 발전시켜나가겠다는 의지가 어느 정도의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지 묻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 의지와 관련하여 일반사회와 함께 맘몬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맘몬은 경제공동체를 강화하는 것만이 이 시대에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라고 한편으론 끊임없이 유혹하고 다른 한편으로 위기의식을 조장하며 으름장을 놓습니다. 한국이 이제 경제총량에 있어서 세계 11위에서 13위로 떨어졌다고 호들갑을 떱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런 흐름에 이바지하는 집단으로 몰락해가고 있는 과정에 있습니다. 표피적으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같지만 그 내용을 파헤쳐보면 결국 맘몬을 예배합니다. 여호수아적으로 표현하자면 땅, 즉 맘몬이 하사하는 부동산의 확장에는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순수하고 진실한 예배는 등한시합니다. 하나님은 부동산 확장의 신앙적 당위성을 제공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현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예배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는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컨대 부동산 증식처럼 사회법으론 아무런 하자가 없는 자기 재산증식의 가능성을 아예 포기하거나 이미 축적된 자기 재산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구체적 순종을 동반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나라는 유지되고 확장되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3. 갈등해소를 통한 공동체의 신앙적 연대(22장)
가나안정복전쟁을 일단락 짓고 땅을 분배받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분단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잠재되어 있었습니다. 열두 지파가 요단강을 중심으로 나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분단문제는 모세의 허락을 받아 이미 요단강 동편에 거주지를 확보해 놓고 있었던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전쟁을 마치고 자신들의 거주지로 돌아가면서 표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 분단과 갈등의 위험한 고비를 잘 넘겨 오히려 신앙적 연대를 공고하게 만들어 갑니다. 신앙공동체에는 이렇게 갈등과 분열의 소지가 있습니다. 이를 잘 극복해나갈 때 하나님나라는 유지되고 확장되어 갈 수 있습니다.
요단강 동편 지파들은 여호수아의 격려, 권면 그리고 축복을 받고 자기 땅으로 돌아갑니다. 승전하여 남아 있었던 가족들과 함께 나눌 전리품까지 챙겨 돌아가는 상황이지만 그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분단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혹시 요단강 서편 땅 즉 가나안에 땅을 갖고 있는 지파들이 자신들을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고 내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단 언덕에 이르자 요단강 서편 즉 가나안 편에 단을 쌓았습니다. 여기엔 하나님을 떠나거나 거기서 그들 따로 제사를 드리겠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요단강 동편의 지파들도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원하는 하나님백성이라는 증거를 남겨놓고자 함이었습니다. 하여 나중에 요단강 서편 지파의 자손들이 요단강 동편 자손들에게 주님으로부터 받을 몫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주님을 경외하는 것을 막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요단강 서편 지파들은 자세한 내막을 파악할 겨를도 없이 흥분부터 합니다.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 그들과의 전쟁을 결의합니다. 제사장 비느하스와 요단강 서편 지파의 리더로 구성된 대표단을 파견합니다. 그들은 요단 언덕이 자리 잡고 있는 길르앗에 이르러 요단강 동편 지파들을 맹렬하게 비난합니다. 브올의 죄악과 아간의 죄악에 빗대어 그들의 행위를 하나님을 배역하는 행위요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게 하는 행위라고 주장합니다. 그럴 거라면 요단강 동편 땅을 포기하고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요단강 서편 땅으로 건너와 다시 땅을 분배받으라고 요구합니다. 이런 저돌적 반응을 볼 때 그들 마음 한 구석에는 요단강 동편 지파들이 하나님을 배반하지는 않을까하는 깊은 염려가 잠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단강 동편 지파들이 같이 흥분하지 않고 자초지경을 침착하고 자세하게 설명함으로 말미암아 오해는 풀리고 갈등상황은 종결됩니다. 대표단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온 지파 가운데 함께 계심을 확인하고, 요단강 동편 지파들이 단을 쌓은 것은 무죄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일이 없게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대표단의 보고를 들은 요단강 동편 지파들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요단강 동편 지파들과 싸우자는 말을 다시는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요단강 동편 지파들은 자기들이 쌓은 단을 일컬어 ‘주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우리 모두에게 증명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온 이스라엘 백성은 신앙적으로 더욱 굳게 연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공동체 안에 있는 분단과 갈등의 소지를 잘 극복해나가면서 유지되고 확장되어 갑니다. 하나님나라를 통해 형성된 공동체라고 해서 아무런 갈등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아직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불완전성은 서로에 대한 불신입니다. 초대교회를 보십시오. 헬라 파 유대인들 사이에 히브리파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 생겼습니다(행 6:1). 자기들에게 속한 과부들이 그 날 그 날의 식량을 나누어 받는 일에 소홀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헬라말을 한다고 정식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가 보다, 라는 불신이 생겼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합니다. 사회적 계층, 성별, 학벌과 재력 혹은 가문 등이 그 기준이 되어 그룹이 형성됩니다. 이를 둘러싸고 불신이 발생합니다. 특히 약자들 그룹에 속한 이들 가운데 부당한 대우 때문에 원망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할례시행여부와 관련하여 예루살렘교회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 그리스도인 그룹과 이방인 사역 그룹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발생했습니다(행 15:1-2). 서로에 대한 신앙적 정체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습니다.
또한 바울이 개척한 교회인 고린도 교회에서는 지도자를 둘러싸고 정통성 혹은 우월성 논쟁이 벌어졌습니다(고전 1:11-12). 서로 자신들이 추종하는 지도자들 즉 바울, 아볼로, 게바 심지어는 그리스도에게 각각 신학적 신앙적 정통성 혹은 우월성이 있다고 주장하며 분쟁하였습니다. 이 역시 오늘의 신앙공동체서도 빈번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를 잘 극복해나가는데 하나님나라의 건강성 유지와 확장의 길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사도행전 15장에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고 서로 만나 진실하고 진지한 대화를 해야 합니다. 상호소통을 통해 오해와 편견을 떨쳐 버려야 합니다. 적대감을 해소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서로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확인되면 어떤 차이도 극복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 특별히 개신교회를 통해서 하나님나라가 확장되어 갈 것을 기대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너무나 조그만 일들로 싸우고 갈라서 왔기 때문입니다. 카톨릭 교회에 비해 개신교회가 사회에서 너무나 무력하고 홀대당하는 큰 이유 중 하나입니다. 신앙공동체의 신앙적 연대를 확고히 해나가기 위한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게 요청되고 있습니다.
4. 신앙적 지도자 여호수아를 통한 언약갱신(23-24장)
1) 신앙적 지도자의 중요성
23-24장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인 여호수아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가 잘 그려져 있습니다. 특히 24:31에 잘 요약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생전에 줄곧 주를 섬겼고,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도, 주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모든 일을 아는 장로들이 살아 있는 날 동안에는 주를 섬겼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을 다 멸하시고 안식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물론 그 안식은 아직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여호수아는 이제 매우 늙어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쯤 되면 긴장을 풀고 여생을 좀 더 편안하고 즐겁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 때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더욱 바짝 긴장하여 신앙적 리더십을 발휘합니다.
하나님나라가 건강하게 유지되고 확장되어져 가려면 신앙적 리더십이 결코 단절되면 안 됩니다. 신앙적 리더십이 단절되는 지점에서 신앙공동체는 와해되기 시작하고 그와 함께 하나님나라는 정체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를 펼쳐갈 때 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공동체를 통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는 여호수아 같은 진정한 지도자들의 결여 혹은 부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교계지도자라는 인물들이 오히려 맘몬숭배의 기독교적 변종인 기복신앙을 매력적인 버전으로 계속 업그레이드해서 교인들에게 공급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여호수아의 리더십을 잘 배워 오늘 우리시대에 창조적으로 적용해나가야 할 때입니다.
2) 신앙적 지도자의 역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 중에도 자신의 사후 분권화된 리더십을 이어나가야할 대표들을 불러내 유언이나 다름없는 고별사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매우 중요한 시점에 놓여 있습니다. 가나안정복 전쟁에서 승기를 잡았습니다.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여 도상으로 가나안 땅 전부를 분배할 만큼 자신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가나안 땅을 완벽하게 다 장악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남아 있는 지역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을 수 있는 위기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기고만장해서 하나님보다 자기들의 전쟁능력을 신뢰하여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다른 한 편으론 영적으로 나태해져서 다시 두려움에 빠져 남은 전쟁을 포기하고 남은 족속들과 적당히 타협하며 지내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여 여호수아는 자신을 이어 리더십을 이어가야할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명확히 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친히 가나안 정복전쟁에서 싸우셔서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끄셨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3, 9-10). 인간에겐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자기들의 위업을 기념하며 즐기고 싶어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소외시키기고 어리석게도 자기를 숭배하는 어리석음에 빠집니다.
한국교회가 깊은 위기의 함정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짧은 기간 동안 세계를 놀라게 하는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대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불행하게도 그러한 승리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람에게 존경과 애정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대형교회를 만드는데 성공한 목회자들은 무소불위의 권세를 행사합니다. 미국 LA에 있는 잘 나가는 모 한인교회 담임목사는 최근 ‘담임목사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는 취지의 강의를 했습니다. 참 담대한 발언입니다. 일개 담임목사가 하나님 행세를 하는 셈입니다. 하나님께서 싸워주신 것을 망각한데서 비롯되는 발상이요 망언입니다. 하나님나라 백성은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언제나 기억하고 철저히 겸손해져야 합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망각하는 순간 하나님나라는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둘째, 갈림길에서 영적으로 나태해지면 하나님나라를 확장해나가기는커녕 그 동안 누려왔던 하나님나라의 축복마저 다시 상실하게 된다는 경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앞에는 두 가지 갈림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 까지 싸워주신 하나님을 친근히 하여 그와 맺은 언약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입니다. 즉 어떤 우상에게도 눈을 돌리지 않고 하나님 여호와만을 사랑하고 그가 주신 율법을 준행하면서 용감하게 가나안 정복전쟁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적으로 나태해짐으로 말미암아 두려움에 사로 잡혀 남은 정복전쟁을 포기하고 적당히 이방민족과 타협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만일 후자를 택하면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 같은 이방민족 때문에 그들은 결국 약속의 땅에서 ‘속히’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경고합니다.
슬프게도 한국교회는 이미 쇠퇴의 길을 들어섰을 뿐 아니라 그 속도가 점점 더 가속화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는 우리들 자신의 경험과 각종 객관적 통계를 통해 분명히 입증되고 있는 바입니다. 이를 부정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지금 필요한 리더십은 우선적으로 그 원인이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나태와 타협에 있다는 점을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강력하게 외치는 데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현대사회가 열렬히 추종하는 맘몬과 타협하여 무서울 정도로 세속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맘몬을 사랑하는 만큼 아니 종교의 힘을 가미하여 그보다 더 열정적으로 맘몬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맘몬을 주인으로 삼아 그의 입맛에 맞게 신학과 설교, 교회조직과 제도를 재조정해 왔습니다. 급기야는 감리교회 감독회장 후보로 나선 한 유명한 대형교회 목사는 최근 ‘세습목회는 가장 성서적’이라는 망언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특권의 대물림을 정당화해주는 맘몬의 힘이 얼마나 교회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언제나 진행형입니다. 지금까지 아무리 활발하게 펼쳐져 왔다고 하여도 지금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사랑을 잃어버리고 세상과 타협하는 순간 순식간에 무너지게 됩니다. 하나님나라는 살아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한 생명체가 자라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부패하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축복하시는 것은 그가 인간적으로 다른 사람이나 집단보다 우월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인 이웃사랑을 구체화하는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통해 정의, 평화 그리고 희락이 넘치는 하나님나라가 펼쳐져 갑니다(롬 14:17). 그러나 그 핵심을 놓치는 순간 하나님의 백성은 그 정체성을 상실하여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하게 됩니다(고전 13:2). 멸망만이 그 앞에 남아 있을 뿐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자신의 손으로 그의 백성을 붙들어 주셔서 원수들로부터 보호하실 것입니다(요 10:28-29). 그의 백성은 원수를 눈곱만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더 무서운 적은 자기 안에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을 뿌리치고 영적 타협과 배교의 길을 굳이 걸어간다면 하나님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히 6:4-8). 쇠퇴와 멸망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를 유지하고 확장해나가기 위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지금까지 누려온 것에 도취되어 영적으로 나태해져서는 안 됩니다. 바울처럼 아직 다 이루지 않았음을 명심하고 앞에 놓여져 있는 푯대를 행해 달려 나가야 합니다(빌 3:12-16). 그 과정에서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절대로 한 눈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과 맺은 언약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런 삶이 결코 힘겨운 것만은 아닙니다. 삶의 여정에서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는 감격과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빌 4:13). 진리 안에 있는 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요 8:31).
여호수아는 간곡한 고별사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들을 다시 세겜으로 불러내 엄숙하게 하나님 앞에 세웁니다. 그리고 여호와와의 언약을 갱신하는 절차를 밟습니다. 먼저 여호와의 구원사 회고를 대독합니다(2-13). 구원사가 다루는 범위는 아브라함의 부름으로부터 시작해서 가나안 정복에 까지 이릅니다. 언약을 갱신하는 데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헛된 노력을 기울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보려고 발버둥 칩니다. 순서가 잘못되었기에 헛수고입니다. 하나님과의 깨진 관계를 회복하는 첫 걸음은 하나님이 나와 공동체를 어떻게 구원해 오셨는가를 먼저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둘째, 어떤 형태의 우상도 다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촉구합니다. 이 과정에서 여호수아는 단호한 리더십을 발휘합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좋게 보이지 않으면 어떤 우상이든지 마음에 드는 우상을 선택하여 섬기라고 말합니다.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하거나 둘을 동시에 섬겨보려는 뜨듯 미지근한 태도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리더십입니다. 우상과 하나님 사이를 오가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강하게 말하면 축복의 복음에 기초한 삼중 축복론, 『야베스의 기도』, 『깨끗한 부자』, 『긍정의 힘』, 『잘 되는 나』 등은 교묘하게 이런 유의 신앙을 부추기고 것들입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맘몬과 하나님 둘 중에 한 분을 선택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는 리더십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여호수아는 모든 사람들이 다 우상과 타협해도 자기와 가족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입니다. 나이가 들어 늙어갈수록 여호수아는 변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적 순수성을 더욱 아름답게 지키고 있습니다. 이런 지도자가 정말 그리운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강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대세를 거스르며 좁고 험하지만 바른 길을 죽음의 순간까지 걸어가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그런 지도자가 일어날 수 있도록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지도자를 양성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부족하지만 주님이 원하시면 나 자신 그런 지도자로 나설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질투 때문에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상기시키면서 불순종의 대가는 멸망이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 점 또한 우리 시대에 너무나 필요한 메시지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을 너무 쉽게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맘몬을 더 사랑하면서도 스스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부자청년을 양산하고 있습니다(마 19:16-22). 적당하게 율법을 준수하고 나누는 삶을 살고 또 적당하게 부의 풍요를 즐기는 삶을 모범적인 신앙인으로 제시합니다. 이런 함정에 빠진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사실은 맘몬과 부를 섬기면서 하나님을 그 정당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에게 여호수아의 경고가 필요합니다. ‘너희가 능히 하나님만을 섬길 수 없다고!’ 예수님의 도전이 필요합니다.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 준 다음 나를 따르라고!’
또한 불순종의 대가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인기 있는 목회자는 조엘 오스틴처럼 항상 긍정적이고 달콤한 말만 할 뿐 무거운 말을 절대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교인들은 달콤한 마약에 중독되어 가고 있습니다. 해독제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불순종의 대가는 멸망이라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선언하는 메시지입니다.
넷째, 여호수아의 강력한 촉구에 따라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고백한 하나님의 백성을 증인으로 세웁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가 고백한 말을 신중하게 받아들이고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고백한 바를 쉽게 잊어버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는 신앙고백을 너무 가볍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백하고 잊어버려도 될 것 같은 가볍고 감상적인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이제는 좀 더 엄숙하고 진지하게 신앙고백을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새롭게 바꿔나갈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다섯째, 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생겨 증거로 삼습니다. 돌을 볼 때마다 자신들이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기억함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신약시대에는 돌에 하나님 말씀을 새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성령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주십니다. 그 말씀이 기억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시대에 요청되는 지도자는 성령의 힘을 입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은 곳에 심어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입니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순종되어 그 세력을 얻어가는 현장입니다(행 6:7; 12:24; 19:20).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펼쳐지는 세계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자신과 동역자를 추천하는 편지요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추천하는 편지라고 담대히 말합니다(고후 3:1-3). 이는 그들의 인격과 삶이 바울과 동역자들을 통해 그들의 마음에 쓰여 진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시대는 하나님의 말씀 아닌 것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그런 것들을 다 제거하여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만을 강력하게 증거하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새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일어나도록 내가 그런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새겨진 말씀을 기억할 때 마다 정신 바짝 차려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맺음말
그리스도인들과 그 신앙공동체는 하나님나라를 이미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나라를 유지할 뿐 아니라 더 확장해나가는 놀라운 사명을 지닌 존재들입니다. 그 길이 쉬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길입니다. 그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것이요 하나님나라가 완성되는 날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그 종착역에 기쁨으로 도착하려면 몇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첫째, 신앙공동체 내부와 신앙공동체가 몸담고 있는 사회에 사람들 사이의 사법적 정의가 구현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둘째, 구체적 희생과 헌신을 통해 예배공동체를 실현해나가야 합니다. 셋째, 신앙공동체 내부의 갈등과 분단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신앙적 연대를 확고히 해 나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담대한 신앙적 지도자를 통해 끊임없이 여호와와의 언약을 갱신해나가야 합니다.
이런 아름다운 일들이 창립40주년을 맞이하는 ESF 서대문 신앙공동체 가운데 일어나 하나님나라가 더욱 공고해질 뿐 아니라 힘차게 펼쳐져 나갈 수 있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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